2009년 11월 7일 토요일

헌혈이 심장에 무리를 준다고?

최근에 여러 사이트에서 아래와 같은 글이 돌아다닌 적이 있었다. 대충 검색해보니 이번이 처음이 아니라 몇 달 전에도, 작년에도, 그리고 몇 년 전에도 돌았던 모양이다. 그럼 도대체 원 출처는 어디일까 궁금했지만 이런 글의 특성상(...) 추적이 불가능할 것으로 생각되어 그만 포기.

헌혈의 진실(...일 리 없지만 아무튼 펼치기)


참 글이 짜집기에 내용도 중구난방인 것만큼이나 여러 사이트에서 거기 달리는 반응들도 중구난방이었다. 다만 개인적으론 우리나라에서 적십자의 이미지도 참 나쁘다는 걸 알게 됐다는 게 소득이라면 소득이었달까. (근데 도대체 왜? 의사라면 다 까고 보는 사람들이니 불똥이 적십자에도 튄 걸까? ) 아무튼, 대충 돌아다니면서 살펴본 네티즌들의 "적십자 까는 패턴" 은 대개 아래의 패턴 중 하나로 보였다.

1. 헌혈증 내면 공짜라더니 천원밖에 안 깎아준다 (윗글 33세 가장의 유형)
1-1. 헌혈증 내면 우선적으로 수혈해주는 줄 알았는데 아니더라
2. 적십자가 제약회사에 피팔아 돈번다
2-1. 적십자가 혈액사업 독점했다
2-2. 적십자 비리 많다
3. 헌혈 위험하다
3-1. 에이즈, 간염 ㅎㄷㄷ
3-2. 심장에 무리가 간다

글쎄, 그 즈음 해서 이글루스의 Charlie님이 쓴 글이나, 대한적십자사의 해명글(직접링크가 걸리지 않는다-_-; 상단 질문나눔이-자유게시판-헌혈에 대한 진실)로 대부분의 의혹(애초에 그런 의혹들이 제대로 된 근거를 갖고 있지도 않았지만)은 해소되었을 거라고 본다(아니, 그렇게 믿고 싶다... 저렇게 해 줘도 그 모든 게 조작이고 음모이며 우리는 적십자의 혈액매트릭스에 살고 있다고 믿는 사람들은 여전히 있을 거다).

저 글을 처음 보고는 나름 재밌어서 마침 아직 집에 굴러다니고 있던 법규 책 뒤져가며 혈액관리법 공부도 하고 그랬는데(그 결과 대부분 개소리임을 확인할 수 있었고), 그보다 더 관심이 갔던 건 바로 "심장에 쇼크가 누적돼서 나이들면 고생한다"는 소리. 물론 이 주장 또한 근거는 없었다(아니, 있었다. '아는 의사'가 그랬다! 고......).

그래서 자료를 한 번 찾아봤다. 사실 쉽지 않았다 orz 한참을 PubMed랑 씨름한 후에야 적절한 검색어를 찾을 수 있었고, 참고할 만한 논문들이 검색에 걸리기 시작했다. 근데,

헌혈과 심장질환 사이의 관계를 살펴본 논문 따위 아무리 찾아봐도 개뿔 없는 거다.

헌혈의 합병증complication 혹은 부작용adverse effect에 대해서 다룬 논문들은 왕왕 있었는데, 맨 혈종hematoma이나 멍 bruise, 끽해봐야 일주일 갈까말까 한 헌혈부위 변색이나 통증이고. 좀 심한 케이스로 나오는 게 혈관미주신경성 반응vasovagal reflex로 인한 실신 정도니 영 재미가 없는 거다. 오죽하면 사실 실신하는 건 별 문제가 아닌데 실신하는 과정에서 넘어져 다치는 게 더 큰 문제라고 할까. 몇 건의 논문을 살펴봤는데 미국 적십자의 BH Newman 이란 사람이 잘 정리해놓은 것 같다.

Curr Opin Hematol. 2004 Sep;11(5):339-45.
Blood donor complications after whole-blood donation.
Newman BH.

원문은 셀프 :D ...지만, 대강의 내용이 정리된 표 하나만 옮겨 보면(저, 저작권...;; )

(클릭하면 커집니다)


이 사람들은 두 번 조사를 했는데, 한 번은 헌혈하는 바로 옆에서 관찰, 한번은 헌혈 3주 후 인터뷰를 했다고 한다. 헌혈한 자리에 멍이 들거나 통증이 생기는 경우는 흔하고, 어지럼증을 느끼거나 실신하는 경우도 종종 발생하는 모양이다.

물론 신체에 아무 손상없이, 아무 영향없이 피만 뽑아낼 수 있다면야 참 좋겠지만 애석하게도 현실은 그러하지 못하다. 즉, 헌혈을 할 때도 예상되는 부작용을 고려해서 나름 손익계산을 해야 된다는 얘기다. 팔에 멍들거나 좀 아픈 건 기껏해봐야 일주일이고, 몸에서 피가 빠져나가니 사람에 따라서 좀 어지럽거나 다른 전신적 반응을 보일 수도 있지만 그것 역시 길어야 일주일. 그래서 헌혈한 당일은 격한 운동은 자제를 해 줘야 되는 것이고... 혈관미주신경반응은 헌혈행위 자체보다도 헌혈자의 정신적, 심리적 상태에 더 큰 영향을 받는 문제니까 사전에 충분한 설명과 긴장 및 불안감 해소, 그리고 통증을 최소화하는 게 중요하겠지(특히 처음 헌혈하는 사람일수록 더더욱). 헌혈 끝나고 바로 떠나지 말고 15분 정도 쉬다 가는 것도 좋겠고.

이 정도 리스크까지 감수해 가며 도저히 헌혈을 할 수 없다 하는 사람은 헌혈을 안 하면 된다. 다만 그걸로 다른 사람들에게 공감을 얻기는 쉽지 않을 거다.

...이상이 헌혈시 발생할 수 있는 나름 '흔한'부작용들이고, 애초의 주제였던 심장으로 돌아가 보면,
표의 맨 아랫줄에 MI, stroke, etc 등이 있고, very rare 라고 되어 있다. 그러니까, 없지 않다는 얘기다. Newman은 헌혈로 인한 심장질환과 관련하여 3편의 논문을 참고하고 있는데, 해당 논문들은 아래와 같다.

Complications arising in donors in a mass blood procurement project.
Am J Med Sci 1945, 209:421–436.
Boynton MH, Taylor ES

Reports of 355 transfusion-associated deaths: 1976 through 1985.
Transfusion 1990, 30:583–590.
Sazama K

Severe outcomes of allogeneic and autologous blood donation: frequency and characterization. Transfusion 1995, 35:732–737.
Popovsky MA, Whitaker B, Arnold NL

두 번째와 세 번째 건 원문 파일을 구할 수가 없었고(도서관에 가면 복사할 수 있을 것도 같은데, 영 시간을 낼 수가 없었다 orz), 오히려 무려 1945년에 나온 첫 번째 논문의 PDF 파일이 구해지는 사태가 발생했다.

Boynton의 1945년 논문은 1942년부터 1944년까지 미국에서 행해진 약 700만건의 헌혈(350만명의 헌혈자)을 대상으로 합병증의 발생을 조사했는데, 그 중 18명에서 헌혈 48시간 이내 심장질환이 발생했고, 그 중 10명이 사망했다고 보고하고 있다. (저자가 보험회사의 자료를 인용하면서 밝힌 바에 따르면, 이는 일반적인 심장질환 사망률과 차이가 '없다')

그리고 또 한 가지 고려할 점은, Boynton의 조사는 1940년대에 이루어졌고, 지금은 2009년이라는 점. 피 뽑는 기술도 많이 발전했을 테고, 헌혈자 선별하는 기준도 더 엄격해졌다. (실제로, 당시 헌혈 후 사망한 사람들을 지금 기준으로 검사하면 반 이상이 헌혈도 못하고 집으로 돌아가야 된다)

그래서 결론, 헌혈의 위험성은 저 정도라는 거다. 물론 똑같은 숫자를 보여 줘도 개개인이 느끼는 위험의 크기는 다를 수 있다. 문제는 그게 얼마나 다른 사람들의 공감을 끌어낼 수 있느냐는 거겠지. 어쨌든 위의 자료만 놓고 얘기할 수 있는 건,

"헌혈하고 심장질환으로 죽을 수 있는 가능성이 '존재'한다" :P
(물론 헌혈이 원인이라는 증거 따위는 없다. 즉 애초에 심장마비로 죽을 사람이 마침 헌혈을 했단 이야기 :D)

...그러니까 나한테 저걸 해석하라고 하면 '하나도 안 위험하니까 걍 헌혈하삼' 이라고 대답할 거다.
물론 "그래도 지금 헌혈이 100% 안전하다고 보장할 수 없다는 거잖아요!!!" 라고 개드립칠 사람들이 눈에 선하긴 하지만 어쩔 수 없지 뭐. 광우뻥 때도 그렇고 하루이틀 보는 일도 아니니 :D

다만 아쉬운 건, 헌혈 심장쇼크 드립을 치는 사람들 주장의 요지는 '심장에 쇼크가 누적되어 먼 훗날 문제가 생긴다'는 건데, 그걸 확인할 수 없었다는 거다. 지금까지 본 사망사례들은 헌혈 후 48시간 이내에 발생한 것들이니까. 그걸 확인하려면 젊어서부터 헌혈 많이 한 사람들이랑 헌혈 안한 사람들을 선정해서 계속 추적, 심장질환 발병률을 추적해야겠지? 한 20년 정도 걸릴까? 통계적으로 제대로 된 결과를 뽑아내려면 표본 크기는 얼마나 잡아야 될까? 이런 거, 가능하기는 할까? 글쎄, 그런 거 전산 데이터베이스 관리만 잘 된다면 어떻게 생각보다 쉽게 할 수 있을 것 같기도 한데, 잘 모르겠다 orz

근데, 애초에 아무 자료가 없는 상황이라면 처음부터 그런 주장을 펴는 것 자체가 문제인 거잖아 :D 근거를 가지고 오라는 말은, 도대체 어디서 뭐하는 누가 어떤 상황에서 한 말인지도 모르는 말을 들고와서는 '아는 의사가 그랬음ㅇㅇ'하는 사람들에게 먼저 해줘야 되는 말이다. 헌혈은 안전하다. 설마 또 사전예방의 원칙 어쩌고 하면서 안전하다는 증거가 없으니까 일단 위험하다고 봐야 된다는 족속들은 없겠지. 난 헌혈로 인해 심장에 무리가 가서 죽을 가능성보다 불의의 사고를 당했는데 혈액이 모자라 죽을 가능성이 더 높다는 데 100원 걸겠다.

이쯤에서 앞부분에 썼던 적십자 까들의 패턴을 다시 한번 살펴보면,

1. 헌혈증 내면 공짜라더니 천원밖에 안 깎아준다 (윗글 33세 가장의 유형)
1-1. 헌혈증 내면 우선적으로 수혈해주는 줄 알았는데 아니더라
2. 적십자가 제약회사에 피팔아 돈번다
2-1. 적십자가 혈액사업 독점했다
2-2. 적십자 비리 많다
3. 헌혈 위험하다
3-1. 에이즈, 간염 ㅎㄷㄷ
3-2. 심장에 무리가 간다

적십자의 해명자료로 빨간 글씨로 된 것들이 충분히 설명이 되리라 본다. 내가 알아보고 싶었던 건 어디까지나 3-2에 국한되어 있었던 거다. 물론 적십자 자료에서도 500회 이상 헌혈한 사람의 사례를 들고 있고... 자, 그래서 이제 적십자 까면서 헌혈 안하겠다는 사람들에게 남아 있는 옵션은 "2-2. 적십자의 비리"뿐. 그래, 까는 것도 좋고 헌혈 거부하는 것도 좋은데, 앞으로는 그러면서 다른 이유 대는 꼴은 안 봤으면 좋겠다. 그들에게 남은 구실은 단 하나다. '적십자 비리 때문에 싫어요!' (있는지 없는지 난 모르겠지만... ) 그런 이유라면야 그들의 존중도 조금은 취향해줄 수 있을 것 같다.

물론 난 헌혈하라면 할 거지만.

세줄요약 :
1. 헌혈이 심장질환을 유발한다 -> X
2. 헌혈하면 심장에 쇼크가 누적되어 장기적으로 안 좋다 -> 전혀 근거없음
3. 헌혈 ㄱㄱ



p.s. 근데 도대체 누구였을까? 뭐 하는 사람이었을까? 도대체 왜? 설마하니 수혈을 거부하는 모 종교단체와 관계있는 건 아니겠지.

댓글 9개:

  1. 비밀 댓글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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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Anonymous - 2009/11/12 10:57
    흥미로운 이야기네요.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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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trackback from: 헌혈에 대한 내 생각
    얼마 전, 적십자헌혈유공장 은장(이하, 은장)을 받았다. 은장은 헌혈을 30회 이상 참여한 사람에게 수여된다. 참고로 50회 이상 헌혈에 참여하게 되면 '금장'이 수여되고, 100회 이상 다회 헌혈자는 '명예의 전당'에 이름을 올리게 된다. <?xml:namespace prefix = v ns = "urn:schemas-microsoft-com:vml" /> <?xml:namespace prefix = o ns = "urn:schemas-micro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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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전 피에 대한 공포증이 좀 있어서 피 뽑을때 숨을 못 쉽니다. 정밀검사한다고 다섯통 뽑았을 땐 기절할 뻔 했지만 심장에 무리가 간다는 건 정말 아니라고 생각되네요. 헌혈하다가 사람 죽어나면 적십자에 갈 타격이 얼만데 그런 리스크를 짊어지고 헌혈하자고 홍보한다고 생각하는 걸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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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부두인형 - 2009/11/29 14:46
    그런 공포심리를 잘 다독여주는 것도 의료진이 해 줘야 하는 일이긴 한데, 그런 면으로는 좀 부족한 감이 있죠. 헌혈이 그 정도로 위험한 거라면 헌혈할 때마다 골수이식할 때처럼 병원에 며칠 입원시켜야겠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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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 헌혈 몇 번 하셨소? 나는 서른 몇번해서 은장 받은 사람인데

    헌혈증 한장이 천원에 팔린다는 이야기듣고 헌혈 그만둔 사람이오.



    당신이 생각하는 것처럼 심장에 무리가 가기에 헌혈을 하지 않는 사람은 소수요. 기본적으로 헌혈은 '희생'을 전제로 하고 있기 때문이요.



    하지만 그러한 마음을 돈으로 이용한다면 달라지지. 마음으로 하는 행동을 돈으로 이용하는 기관을 어떻게 따를 수 있겠소? 나처럼 헌혈을 많이했던 사람들이 갑자기 그만 두는 이유는 거의 대부분이 적십자에 대한 신뢰 때문이요.



    본질이 무엇인가 고민하고 그 본질을 설명해야 변화가 이루어지는 것이오. 차분히 님의 글을 읽다보니



    적십자의 해명으로 빨간글로 된 부분들이 설명될 것이라 했는데, 그 해명 좀 링크 걸어주오. 난 한번도 적십자사의 해명을 들어본 적이 없는 것 같소. 헌혈증 한장이 천원에 팔리고 있는 것은 (아마도)사실인듯 한데 그것도 '해명'만으로 해소 된다 생각하시오?



    http://media.daum.net/society/others/view.html?cateid=1001&newsid=20100124191507705&p=segye



    에 달린 댓글을 보고 답변 좀 바라오. 내가 잘못알고 있는 것이라면 나 또한 스스로의 행동을 반성하고 고치겠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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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 @음 - 2010/01/25 01:51
    심장에 무리가 갈까봐 헌혈을 안 하는 사람이 많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이 적십자를 비난하는 와중에 아무런 근거없는 그런 얘기들까지 섞여서 같이 돌아다니고 있는 게 우스워서 그것만 따로 떼서 파 본 것 뿐이죠.



    헌혈증 한장에 천원에 팔리고 있다는 게 무슨 이야기인지 잘 이해가 안 되는데, 적십자에서 제약회사에 혈액을 판다던가 병원에서 수혈받을 때 돈을 받는 그런 일들을 말씀하시는 거라면, 혈액관리법에 혈액 한 단위의 가격과 헌혈증으로 얼마나 보상받을 수 있는지까지도 모두 규정되어 있으니 문제되는 일이 아닙니다.



    헌혈증을 냈는데 천원밖에 안 깎아줬다는 등의 문제라면 관련규정을 살펴보시고 얼마나 보상받을 수 있는지 확인해 보신 후, 금액이 잘못되었다면 병원에 따지시거나 관련기관에 신고하시기 바랍니다. 이는 적십자와는 별 관계가 없는 문제입니다.



    설마 개인간에 헌혈증을 천원에 거래하고 있다... 는 등의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건 아니겠지요. 혈액 혹은 헌혈증서를 돈을 주고 사는 것은 법에서 금지하고 있는 일이니 역시 신고하시면 되겠고, 적십자와는 관계없는 문제입니다.



    적십자 쪽의 해명은 http://cafe.naver.com/sosaboab/7367 에서 읽어보시면 됩니다. 제가 보기에 이 문제의 본질은 '법에 대한 무지+의료인에 대한 불신+음모론'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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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 조금 늦게 확인했네요. 주인장에게 고마움을 느끼오.



    링크를 따라 글을 읽어보니 확실히 작은 음모론 하나가 폭풍우처럼 커지고 확대되어 재생산된 것 같소. 그런것에 휘둘린 내가 부끄러워지오.



    건필하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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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 @음 - 2010/02/04 02:41
    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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