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11월 13일 금요일

열폭하는 당신이 진정한 루저다

그저껜가부터 갑자기 온 인터넷 세상이 '루저'로 도배가 되기 시작했다. 깜짝 놀라서 난 또 뭔가 새로운 개그 코드라도 나왔나 하고 봤는데 이건 뭐... 루저 및 루저녀 관련 글들을 몇 개 대충 보고 가장 먼저 든 생각은, '이것은 답이 없다' 였다.

이번 루저 사건을 보면서 박재범 사건을 다시 떠올렸다. 두 사건의 공통점이라면, 바로 영어가 얽혀 있다는 거다. 박재범 사건 때는 현지에서는 별로 심각한 의미를 갖지도 않는 영어 표현을 가지고 멋대로 조잡한 우리식 해석을 해가면서 박재범을 몰아대던 사람들이, 이번에는 루저녀 본인도 뭔 의미인지 제대로 모르고 사용했을 가능성이 높아 보이는 영어 표현을 가지고 그게 사실 미국에서는 완전 심한 욕이라면서, 거의 f**k이나 흑인에게 니그로라고 하는 것과 비슷한 수준의 욕이라면서 루저녀를 몰아댄다.

미국에서 몇 년간 살면서 영어를 익힌 박재범, 각종 슬랭과 여러가지 표현의 미묘한 뉘앙스에 대해서 한국인들보다 모르긴몰라도 훨씬 더 잘 알고 있을 박재범이 사용한 영어는 멋대로 한국식 해석을 해서 박재범의 말을 차마 입에 담지 못할 욕으로 만들어버린 사람들이, 이번에는 자기가 사용한 표현이 미국에서 뭔 뜻으로 사용되는지도 제대로 몰랐을 가능성이 높아 보이는 한 칠칠치못한 여자의 영어에 대해서는 친절하게도(!) 미국에서는 어떤 의미로 사용되네 어쩌네 하면서 역시 그녀의 말을 차마 입에 담지 못할 수준의 어떤 것으로 만들어버렸다. 제발 일관성을 좀 갖자.

연애상대를 고르는 일은 지극히 개인적인 일이고, 따라서 그 선택에 있어서 유일한 기준은 '개인의 취향'이다. 그리고 적어도 그 영역에 있어서는 우리가 양성평등사회를 만들기 위해 상정한 모든 기준은 무효다. 남자들이 예쁜 여자를 선호하는 걸 '외모지상주의'를 가져다가 비난할 수 있나? 마찬가지로 돈많은 남자, 가슴큰 여자, 키큰 남자, 기타 등등... 에 대한 선호를 비난할 수 있나? 물론 뭐만 밝힌다, 속물이다... 하는 식으로 다른 사람의 취향을 부정적으로 볼 수도 있고, 그런 사람들에게 '너 그러지 마'라고 이야기할 수도 있다. 근데, 적어도 그들의 선택은 도덕적인 비난으로부터는 절대적으로 자유로운 행위다.

이른바 '루저녀'의 표현방식을 문제삼는ㅡ아무리 그래도 '루저'라는 표현은 지나치다는ㅡ 족속들이 있다. 그러나, '연애 상대를 고르는 기준'이라는 것이 본질적으로 개인적이며, 그 기준이 유효하게 작용하는 범위도 어디까지나 그 개인의 마음(혹은 머리) 속을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그러한 개인의 기준을 표현하는 방식, 어휘를 물고 늘어지는 것부터가 배를 산으로 몰고 가는 짓이다. 아니, 애초에 그 발언에 대해서 진지하게 문제를 제기하는 것 자체가 문제다. 그런 걸 가지고 당사자의 인터넷 사용기록 추적에 사생활 실시간 스토킹까지 하고 있는 걸 보니 우리나라 네티즌들은 정말 시간이 많은 것 같다.

제발 자존심이란 걸 좀 갖고 살자. 무슨 진지한 프로그램도 아니고, 그냥 좀 생긴 여자애들 불러다 앉혀 놓고 별 쓸데없는 것들 가지고 시시덕대는 프로그램에서 나온 얘기에, 그것도 지극히 개인적인 얘기에, 더군다나 과장과 설정이 들어갔을 가능성이 다분한 얘기에 왜 굳이 자신을 끼워맞춰서 스스로 루저가 되고 앉았느냐는 거다. 자기가 루저인지 아닌지는 자기 자신이 결정하는 거다. 모든 건 당신 마음에 달렸다. 당신 인생은 겨우 그 정도의 값어치밖에는 없나? 열폭하는 당신이 진정한 루저다.

"취향이라능. 존중해 달라능..."

이른바 '오덕'들을 비하할 때 우스개로 자주 사용되는 표현이지만, 그 말의 울림은 절대로 그렇게 가볍지 않다. 조금 과장을 섞어 말하면, 타인의 취향을 존중하는 것이야말로 현대 사회를 지탱하는 근간이리라. 물론 일정 요건을 충족하는 취향들만이 존중받을 수 있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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