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8월 5일 수요일

진정한 의학은 하나

# 동의보감 사태를 보며.

 

동의보감,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등재

이런 일이 있었다. 그래, 그냥 그랬다는 거다. 좋아할 사람은 좋아하면 되고, 아무 느낌 없는 사람은 그냥 그렇게 있으면 된다. 근데, 좀 엉뚱한 데서 문제가 터졌다.

 

대한한의사협회의 경축 담화문

동의보감 세계기록유산 등재에 대한 의료일원화특위 논평

의사협회 동의보감 폄하 논평 '빈축'

 

대한한의사협회와 대한의사협회에서 나온 보도자료를 놓고, 언론사들이 신났다. 웹서핑을 넓게 하지는 않는지라 장담은 못 하지만, 네티즌들도 덩달아 신난 것 같다. 싸움구경은 재밌는 것이고, 의사들과 한의사들의 싸움은 분명 대한민국에서 가장 재밌는 싸움 중 하나이리라. 개인적인 생각은 뒤에 가서 이야기하기로 하고, 일단 한의협과 의협의 얘기를 각각 나름대로 세 줄 요약해 보자면.

 

* 한의협의 이야기

- 동의보감은 명실상부 한의학을 대표하는 의학서임

- 고로 동의보감의 세계기록유산 등재는 한의학의 우수성을 세계가 인정한 것임

- 열심히 하겠습니다 ^-^

 

 

* 의협의 이야기(1)

- 동의보감의 세계기록유산 등재는 축하할 일임

- 근데 솔직히 의학적으로 봤을 땐 좀 말이 안되는 듯...

- 의학서로써의 가치보다는 문화유산으로써의 가치가 인정된 것임

 

 

일단 접어두고, 아무튼 유네스코가 뽑은 거니까 유네스코의 얘기를 들으면 되잖아.

유네스코의 이야기 - 세계기록유산 선정기준 -펼치기

 

그리고, 이건 동의보감의 세계기록유산 등재를 추진한 모 기관에서 신청서로 제출한 자료 같은데, 영어로 되어 있는 데다가 무려(?) 15쪽이나 되는 관계로-_-; 신청 사유를 간단하게 요약해 보자면 다음과 같다. (길어서 접어놨음)

신청사유 - 펼치기

여기서 '한의학의 우수성'을 세계가 인정했다는 내용을 찾을 수 있나? 그러니까, 우리나라에서 제출한 신청 내용에 한의학이 우수하므로 그 고전인 동의보감을 세계기록유산으로 선정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나? 아니면 유네스코의 (일반적인) 선정기준에 '해당 기록이 그 주제 분야에서 현재에도 우수성을 인정받고 있음'이라는 항목이 있나?


 

없다. 그런 이유가 아니란 말이다. 우리나라의 신청사유란 것도 결국 국가주도의 공공보건사업이었다는 점, 당시 동양의 문화와 의학을 연구할 수 있는 사료로써의 역사적 중요성, 그리고 초판본이 잘 보존되어 있다는 점이다. 유네스코도 그 기록물의 내용이 과학적으로 옳으냐 그르냐를 가지고 기록문화유산 등재를 결정하는 게 아니란 말이다.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선정되면 매년 얼마간 돈도 나온단다. 그건, 동의보감을 가지고 의학서를 쓰고 의학교육을 하고 의학연구를 하는 데 쓰라는 얘기가 아니라, 책 안 상하게 잘 보존해서 당시의 동양의학, 당시의 동양문화와 그 교류를 연구할 수 있도록 하란 얘기다. 근데 왜 한의학의 우수성을 운운하나? 한의학은 의학이 아니라 역사학인가? 동의보감의 세계기록유산 선정을 가지고 '한의학의 우수성을 세계가 인정' 운운하는 것은 혹시 현재의 한의학이 아직도 동의보감의 수준에 머물러 있다는 것을 스스로 인정하는 것인가? (이렇게 되면 둘 중 하나다. 동의보감이 17세기에 쓰여졌음에도 불구하고 ㅡ그나마도 새로운 내용이 아니라 그때까지 전해지던 것을 집대성한 것인데ㅡ 내용이 너무 킹왕짱이라서 지금까지 수정보완할 내용이 없었거나, 아니면 한의학계가 동의보감을 수정보완할 의지도 능력도 없거나)

 

그런 면에서 의협(정확히는 의료일원화특위)의 논평은 지극히 적절하다. 위에도 썼다시피 유네스코가 인정한 동의보감의 가치는 의학서로써의 가치가 아니라, 문화유산으로써, 사료로써의 가치다. 그렇기에 '세계가 인정한 한의학의 우수성'운운하는 한의협의 논평은 자뻑이거나 사기다. 그런 면에서,

 

의사협회 동의보감 폄하 논평 '빈축'(연합뉴스)

의협 “동의보감은 첨단의학서 아니야” 논란 (헤럴드경제)
의사협회 "동의보감에 '황당'내용 가득" 폄하 파문(소비자가 만드는 신문)

‘동의보감 폄하’ 황당한 의사협회 (문화일보)

“세계유산이지만 비상식적 내용 가득” 醫協, 황당한 ‘동의보감’ 폄하 (세계일보)

의사협 ‘세계유산 동의보감’ 폄훼 (경향신문)

의사협 ‘동의보감 폄하’ 논란(한겨레신문)

의사협회, 동의보감 비하 논란(중앙일보)

동의보감 깎아내린 의사협회(서울신문)

 

이런 식의 제목뽑기들은 좀 많이 실망스럽다. '의사들 저거 뭐냐'하는 느낌이 풀풀 나는 제목을 뽑는 저 신문들은 정말로 동의보감의 세계기록유산 등재가 '한의학계의 경사, 더 나아가 우리 민족의 경사'라고 생각하는 걸까? 정말로 '한의학의 우수성을 세계가 인정한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걸까? 물론 나도 동의보감의 역사적, 문화적 가치를 충분히 인정한다. 다만, 아닌 건 아니라는 거다. 유네스코는 의료단체가 아니고, 과학, 교육, 문화활동을 돕기 위한 단체다. 동의보감이 의학적인 면에서 훌륭한 자료인가 아닌가는 애초에 유네스코의 관심사가 아니다. 설사 유네스코가 동의보감을 훌륭한 의서라고 판단하여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했다고 쳐도, 의학분야에 대한 전문성이라고는 없는 유네스코의 평가 따위 한의학계가 기뻐할 일이 아니다. 비전문가의 찬사 따위에 기뻐한다는 것 자체가 한의학의 허접함, 자신없음을 드러내는 증거는 아닌가?

 

의외로(?) 조선일보는 오히려 의협 쪽의 손을 들어주는 듯한 뉘앙스의 제목뽑기를 했고, 애초에 의학계열의 미디어인 코메디닷컴과 청년의사의 제목이 오히려 조선일보보다 중립적이다.

 

"오늘날 상식에는 안맞는 내용으로 가득"(조선일보)

동의보감 등재, 의협-한의계 신경전(코메디닷컴)

‘동의보감’ 유네스코 등재 놓고 醫-韓 공방(청년의사)

 

이번 의협의 반응을 대부분이 그저 의학계-한의학계의 밥그릇 싸움으로 보고 있는 듯한 느낌, 보수와 진보를 막론하고 대부분의 일반 사람들이 막연히 '우리 것은 좋은 것이여'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 같은 느낌... 그리고 사람들이 의사집단에 대해 갖고 있는 이미지가 도대체, 도대체 어떻기에 언론과 사람들의 반응이 이렇게 차가울까 하는 우울한 느낌. 정말이지 답답하다.

 

 

# 의학은 하나다

 

의료의, 의술의, 의학의 목적은 뭘까?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그것이 각 문화권에서 어떤 형태로 나타나건, 그 목적은 결국 건강이다. 좀 자세히 말하자면 질병 상태로부터의 회복과 건강 상태의 유지 정도 되겠다. (단정적으로 썼지만 개인적인 생각을 떠오르는 대로 쓴 것뿐이다. 그러나 모두 동의할 거라고 믿는다-_-;;; )

 

그렇기에, 의학을 나누는 것은 무의미하다. 어떤 방법론을 가지고 있든, 어떤 문화와 철학에 기반하고 있든 위에 적은 의학의 목적에 동의한다면 의학을 나누는 것은 무의미하다. 질병을 치료하는 데 도움이 되고, 건강을 유지하는 데 도움이 되는 방법이라면 무엇이든 받아들일 수 있어야 제대로 된 의학이다. 서양의학이니 한의학이니 중의학이니 대체의학이니 뭐니 해서 서로 다른 형태의 의학, 서로 다른 방법론과 철학을 가진 의학들이 존재한다는 것 자체가 넌센스다. 진정한 의학은 더 나은 치료를 위해서라면, 더 좋은 건강유지를 위해서라면 그 어떤 방법이라도 받아들일 수 있는 열린 체계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 서양의학과 한의학은 다르다고? 웃기지 마라. 환자를 보는 관점이 다르니 철학이 다르니 하는 개소리는 집어치워라. 어떤 상황에서건 "가장" 좋은 방법은 하나뿐이다. 의학은 그 '가장 좋은 방법'을 찾기 위한 끝없는 노력이다.

 

문제는 그 방법이란 걸 어떻게 찾느냐다. 옛날에야 닥치는 대로 아무거나 해 보고 그 중에 어떤 게 괜찮다더라 하면 그 방법을 썼지만 지금 세상에 그럴 수는 없다. 닥치고 생체실험은 윤리적으로 불가능하다. 사람 대상으로 임상시험을 하려면 충분한 세포실험과 동물실험을 통해 안전할 것이라는 확신이 있어야 된다. 인체는 정상일 때는 이렇다. 병에 걸렸을 때는 저렇다. 이 수술법은 이러이러하며, 이 약은 어디어디 작용해서 어떤 효과를 낸다... 하는 등의 근거를 바탕으로 의료행위를 해야 된다는 거다. 수천 년 전부터 쓰여 왔던 방법이라고 해도 지금 그걸 사용하려면 그 근거가 있어야 된다. 옛날부터 쭉 쓰던 방법이라는 말은 더 이상 통하지 않는다. 즉, 의학은 엄격한 과학적 방법론에 기반해야 된다는 거다. 적어도 '서양의학'은 그렇게 하고 있다(물론 현대과학의 발전 이후부터긴 하지만). 실험과 연구를 통해서 끊임없이 새로운 방법을 탐구하고 있고, 기존에 잘 사용되던 방법이라고 해도 역시 연구를 통해서 그 근거를 다지고 있다.

 

근데, 한의학에선 그렇게 하고 있나? 사상의학의 이론적 근거는 확립되었나? 경락과 기혈은 있긴 있는 건가? 찬 음식과 더운 음식은 뭔가? 수많은 한약의 작용기전은 파악되었나? 이런 기사들을 어떻게 생각해야 하나?

 

자진 논문철회 논란…근거 없는 철회 VS 학자의 양심 고백

[과학 칼럼] ‘클라크의 법칙’

 

 

 

# 다시, 의학은 하나다.

 

의사협회, 한방의료기관 X-레이 등 불법사용 강력 대응

솔직히, 이런 기사들 보면 좀 아쉽다. 위에서도 말했다시피 더 좋다는 것이 확인된 방법이라면 형식에, 전통에 구애받지 않고 그 어떤 방법이라도 가져다 사용하는 게 진정한 의학이라고 생각하니까. (물론 저런 것들을 사용하려면 그만큼 철저한 교육을 받아야 될 것이고, 혹시나 저런 걸 교육하는 것마저도 의료계에서 막고 있다면 그건 좀 짜증나는 일이다)

 

의사 면허와 한의사 면허를 통합하자. 의사들에게 침과 탕약을 허락하고, 한의사들에게 메스와 항생제를 허락하자. 의과대학과 한의과대학의 교육과정을 통합하자. 의대생들에게 황제내경과 동의보감을, 한의대생들에게 로빈스와 해리슨을 읽히자. 어떤 방법을 사용할 것인지를 그들의 판단에 맡기자. 어떤 방법이 과학적 방법을 통해 검증된 방법이고 어떤 방법이 그렇지 않은 것인지 그들이 판단할 것이다. 그들이 어떤 방법을 사용하든 그 결과는 국민건강 수준의 변화로 나타날 것이다. 그리고 어떤 방법이 더 좋은지, 무엇을 택하고 무엇을 버려야 할지가 곧 명백해질 것이다. 사실상 대한민국을 거대한 의료시험장으로 만들고 엄청난 혼란과 의료비 지출의 증가를 가져오겠지만 뭐 어때. 의사와 한의사 모두 의료법에서 정하는 의료인이고, 의료인이 배운 범위에서 의료행위를 소신껏 선택하게 하는 것에 법적 하자는 전혀 없을 테니까.

 

...물론 난 한방진료를 하는 병원엔 안 갈 거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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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정작 의협 홈페이지에 올라온 글은 의료일원화특위의 논평이라고 되어 있다. 의협의 공식입장이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은 들지만, 의협의 본심도 크게 차이가 없으리라고 본다.

 

p.s.1

돌아다니면서 기사 읽던 중 이런 걸 발견했다. 이런 프로그램이 있다고... 꼭 봐야겠다 하고 생각하고 있으려니 그 시간에 실험실을 지켜야 된다. OTL...

 

p.s.2

졸린 눈을 비비며 제목을 뭘로 할까 고민하던 차에, 며칠 전에 겨우 끝냈던 어떤 책 10장의 제목이 떠올랐다. 다만 이 글의 내용을 그 책과 연결시키려는 의도는 없었다...-_-;;;

 

p.s.3

동의보감 얘기가 나온 김에 읽어볼만한 것. 한글 번역 동의보감!

http://hidream.or.kr/dongeuibogam/donguibogam_main.html

...사실 나도 아직 읽어보지는 않았음. 정말 투명인간이 되는 법이 나와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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