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8월 23일 일요일

김대중 전 대통령의 죽음을 보며

#1. 인터넷 유감과 조갑제닷컴 안드로메다 기행

김대중 전 대통령 사망 당일, 수많은(아마도 모든) 인터넷 사이트들은 검은 톤의 근조 배경으로 갈아입고 포털들은 '김대중 전 대통령 서거'라는 기사를 긴급속보로 내보냈다.

고인을 애도하는 건 좋은데, 솔직히 별로 마음에 안 든다. 더군다나, 포털의 배경화면 바꾸기나 서거라는 표현은 노무현 사망(과 당시 네티즌들의 압력)으로 인한 학습효과처럼 보여서 더더욱 마음에 안 든다.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기억에 의존한 정보이기 때문에 장담은 못하지만, 2006년 최규하 전 대통령이 사망했을 때, 내 기억으로 배경을 검게 바꾼 포털사이트는 없었다. 애도를 다른 사람 보여주려고 하는 것도 아니고, 각자 자기 마음 속에서 하면 되는 걸 굳이 며칠동안 수많은 인터넷 사이트가 검은 톤으로 갈아입고 있어야 할 이유는 없지 않냐는 거다. 더군다나, 어차피 사람들이 인터넷하면서 계속 그 화면을 보고 있다고 해도, 인터넷 공간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조문이나 애도와는 별 상관없는 일을 한다. 도대체 누구를, 무엇을 위한 배경화면 바꾸기인가? 노무현 때나 이번의 소동ㅡ검은색 배경화면이나 서거 파동ㅡ은 결국 인터넷의 철없는 일부 빠들의 정신적 자위행위를 위한 건 아닌가?

또, 지금까지 사망한 다른 전직 대통령들의 경우를 봐도 서거라는 표현은 노무현 이후에 굳어진 걸로 보인다(아래 자료 참고). 그리고, 노무현 사후 '서거가 옳은 표현이다, 포털사이트는 왜 애도를 표시하지 않느냐'며 설레발치던 일부 네티즌들의 행태를 기억하고 있다.

역대 전직대통령 사망 관련 신문기사 제목


이승만(서거, 운명, 부음), 박정희(유고), 윤보선(별세, 타계), 최규하(별세) 그 누구의 경우에도 노무현, 김대중의 경우처럼 모든 표현이 서거로 통일된 적은 없었다(다만, 노무현의 경우만 盧로 표현된 건 눈에 띈다. 조선일보만 그런지, 다른 신문들도 그런지 찾아보는 것도 재밌을 듯). 최규하 사망 후 노무현 사망까지의 3년 동안 죽은 전직 대통령에 대한 표현을 서거로 하는 것이 좋겠다는 어떤 공감대가 이루어진 거라면 모를까, 이건 좀 아니지 싶다. 그런 면에서,

 ...언론은 객관적이고, 보편적이며, 평등한 용어를 써야 할 의무가 있다. '서거'를 전직 대통령 專用으로 하는 것은 계급적 특권을 인정하지 않는 헌법정신과 맞지 않다. 1987년 이후 현직 대통령에게까지 '각하'라는 말을 쓰지 않도록 한 나라이다... (조갑제, 2009년 5월 23일)

 조갑제가 노무현의 죽음 이후 쓴 글의 일부인데, 적어도 이 대목에만큼은 조갑제에 100% 동의한다. 물론 같은 해 2월에 쓴 글에서는 다음과 같은 모습을 보여주시지만 말이다.

올해는 朴正熙(1917~1979)가 서거한 지 30주년이다. 62년의 파란만장한 생애를 통하여 한국을 근대화시키는 데 旗手(기수)가 되었던 민족사의 大인물이자 20세기를 대표하는 세계적 지도자였다. 그의 삶 속에서 특히 드라마틱하였던 62개 장면들을 뽑아 소개한다. 이 장면들은 박정희 개인뿐 아니라 한국인들의 삶에 큰 영향을 준 것들이다. 별도의 설명이 없는 장면은 필자가 쓴 '朴正熙 傳記(全13권)'에서 뽑은 것이다... (조갑제, 2009년 2월 17일)

1987년 이전의 대한민국은 민주주의 사회라고 볼 수 없었으니, 유신독재체제의 수장으로 살다 민주화 이전에 죽은 박정희에게 그가 살았던 시대의 가치관을 적용해 전제군주에게 맞는 어휘선택을 한 거라면야 뭐 할 말은 없겠다. 다만, 이 분이 자신이 지지하고 존경하는, 한국 근대화의 기수가 되었던 민족사의 대인물이자 20세기를 대표하는 세계적 지도자 박정희 각하의 서거 30 주년을 맞아 쓴 글도 '사망'이나 '피살' 혹은 '죽음'정도의 어휘를 사용해서 고쳐쓰는 정도의 일관성을 보여준다면야 앞으로 이 분의 글도 진지하게 읽어 드릴 의향은 있다.
(조갑제닷컴이 그냥 조갑제의 개인적 공간이라면 내 글도 번지수를 잘못 잡은 것이긴 하다. 조갑제가 말하고 있는 건 '객관적이고, 보편적이며, 평등한 용어를 써야 할 의무가 있'는 '언론'에 해당되는 내용이니까... 근데 조갑제닷컴을 보면 난 이걸 개인사이트라고 봐야 할지 아니면 또 다른 무엇으로 봐야 할지 모르겠다. 돈을 내면 어떤 특전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무려 '유료 존'도 있다. '수익추구를 한다고 해서 개인사이트가 아니고 언론이다'라고 할 수는 없겠지만, 그 구성이나 여러가지를 볼 때 조갑제닷컴을 최소한 그냥 개인사이트나 블로그 수준으로 보기엔 무리가 있지 싶다)

그래서, 김대중 사후 모든 기사의 제목이 '서거'로 통일되는 것을 보면서 조갑제가 또 노무현의 죽음 때처럼 서거드립을 치지 않을까 생각하고 조갑제닷컴에 구경을 갔던 건데, 아무래도 한번 써먹은 건 식상하셨던 것 같다. 이번엔 국장을 트집잡기 시작하셨다.

조갑제의 국장 태클


한참 웃다가, 문득 이명박이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왼쪽에서 씹히고 오른쪽에서 까이고... 김대중 국장이 불만이면 국장의 빌미를 만들어 준 법을 까던가, 굳이 국장을 요구한 유족 등을 까던가. 적법하게 장례 치뤄준 이명박은 또 무슨 잘못이람. 정치적으론 이명박에게 반대하지만 인간적으론 이제 동정심마저 들려는 순간이다. 조갑제는 혹시 우파의 X맨을 가장한 지능적 우파가 아닐까(뭔소리래-_-; )?


#2. 서울광장을 다녀와서

목요일, 서울광장에 가서 그를 조문했다. 솔직히, 난 어려서 김대중-박정희, 김대중-전두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잘 모른다. 거기까지는 별로 관심없기도 하고... 지금 내가 갖고 있는 김대중에 대한 존경의 마음은 사실 내가 좋아하는 모 사이트의 모 논객들의 글에 영향을 받은 바가 크다. 그냥 그렇다는 얘기고... 아무튼, 그런 마음으로 조문을 하러 갔다.

가서 근조리본을 받고 줄을 서서 들어가는데, 좀 짜증나는 게 있었다. 장례식장 천막 기둥 이곳저곳에 붙어 있던, 이명박과 조중동을 욕하는 문구들이 쓰여 있는 플래카드들. 급하게 대충 만들었는지 검은색과 붉은색 매직으로 손으로 쓴 글씨와 조잡한 문구들... 사진이라도 찍어 올리면 좋겠지만 장례식장까지 가서 사진을 찍고 싶지는 않았다. 근데, 도대체 장례식장에서 뭐 하는 짓거리들이지?

물론 김대중이 노무현의 경우처럼 뒤끝있는 정권의 표적수사로 핍박받다가 자살해버린 건 아니지만, 분명 김대중의 죽음은 그가 갖는 상징성, 그리고 그의 일생과 정치철학을 되돌아보게 하는 효과가 있었을 것이고, 그에 따라서 어느 정도 그와 그를 따르는 정치세력들을 돋보이게 하며 그 반대쪽에 있는 정치세력들을 안 좋게 보이게 하는 효과가 있었을 거다. 근데 그런 자리에다가 매국노니 뭐니 하는 배설글들을 걸어 놓는 건 도대체 뭐 하자는 짓이냔 말이다. 고인에 대한 예의도 예의지만, 정말 냉정하게 봐서, 정치적으로도 전혀 도움이 안 된다는 거다. 딱히 특별한 정치적 성향이 없는 사람이 한 원로정치인의 죽음에 애틋한 마음이 들어 광장을 찾았다가 '이명박 나쁜놈, 조중동 보면 매국노' 뭐 이 따위 글들이 걸려있는 걸 보면 무슨 생각이 들지 잘 상상이 안 되는 걸까? 이건 도대체 개념도 없고 뇌마저도 없는 게 아니라면 어떻게 저런 짓을 할 수 있는 거지? 그런 걸 왜 장례식장에서 하는 걸까? 이건 뭐 죽은 시체를 파먹고 사는 언데드들인가? 장례식장 안에서는 그냥 죽은 사람에 대한 추모만 하면 안 되나? 그게 그렇게 힘든가?

아무튼... 그랬다는 거다. 마지막으로 할 말이라면,

"그 동안 수고 많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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