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4월 26일 월요일

어떤 논리


이거야 뭐, 굳이 설명 안 해도 누구나 알 만한 장면이겠지.

수비 지역에서 공을 돌리다가 홍명보가 공을 뺏겨 경기 시작 12초만에 한 골을 먹었다. 결국 3:2로 졌다.

볼처리가 깔끔하지 못했다며 홍명보를 탓하든, 패스가 깔끔하지 못했다며 패스 준 사람을 탓하든 그건 보는 사람 맘이지만, 아무튼 위의 문장은 사실이다.

그런데, 경기를 직접 보지는 못하고 결과에 대해서 위의 설명만 들은 어떤 사람이 있다고 치자. 근데 그 사람이 저 설명을 듣더니 대뜸 아래와 같이 반응한다면 어떨까?

  • 경기 시작 12초만에 무려 월드컵 4강 팀을 상대로 무려 홍명보의 공을 뺏어서 무려 이운재의 수비를 뚫고 골을 넣었다고? 그 공격수는 무슨 클로킹이라도 하나 보네?
  • 경기 시작 12초만에 무려 월드컵 4강 팀을 상대로 무려 홍명보의 공을 뺏어서 무려 이운재의 수비를 뚫고 골을 넣는 공격수를 보유한 팀이라면 브라질이고 뭐고 다 필요없고 세계최강이겠네?
  • 경기 시작 12초만에 무려 월드컵 4강 팀을 상대로 무려 홍명보의 공을 뺏어서 무려 이운재의 수비를 뚫고 골을 넣는 팀이라면 경기당 450골(90분/12초) 넣겠네? 근데 3:2라는 걸 믿으라고?
  • 경기 시작 12초만에 무려 월드컵 4강 팀을 상대로 무려 홍명보의 공을 뺏어서 무려 이운재의 수비를 뚫고 골을 넣는 팀이 겨우 월드컵 준우승이라고? 그걸 믿으라고?
  • 마침 거기서 패스가 어정쩡하게 가고 홍명보마저 실수를 하는 일이 겹쳐서 일어나는 바람에 공을 뺐겼다고? 그걸 믿으라고?
  • 상대편 공격수가 바로 등뒤로 다가와 공을 빼앗아 골을 넣을 때까지 홍명보는, 이운재는, 월드컵 4강 전력의 대한민국 선수들은 뭘 하고 있었나? 히딩크는 책임지고 물러나야 되는 거 아닌가?

요즘 어디서 많이 본 논리 아닌가.
북한의 잠수함이 초계함의 감시망과 연합훈련중인 한미 해군의 감시망을 다 뚫고 바다에 깔린 그물들도 다 피해 넘어와서 어뢰를 쏘고 다시 돌아갔는데 소나에도 안 잡히고 견시병도 아무것도 못 봤다고? 무슨 친환경 스텔스 녹색어뢰냐? 북한해군은 세계최강에 전쟁나면 우리해군은 아무것도 못하고 몰살이겠네?

물론 확률이란 건 믿기 어려운 어떤 일이 벌어졌다는 주장에 대해서, 그 주장의 신빙성을 파악하는 데 유용한 도구이긴 하다. 근데 어디까지나 확률적으로 그렇다는 얘기. 확률이 낮아도 일어날 일은 일어나고, 확률이 아무리 높아도 안 일어날 일은 안 일어나는 거다.
또 어떤 일이 벌어졌다는 건 수많은 가능성들 중 그 시점에는 그 가능성이 현실로 나타났다는 것이지, 지금 이렇게 됐으니까 앞으로도 같은 상황이라면 이렇게 될 거라는 얘기가 아니다. 예전엔 이런 적 없었는데 이번엔 왜 이렇게 됐냐는 말도 마찬가지고.

...물론 비유는 그 비유의 대상이 되는 현상을 정확히 반영하는 건 아니다. 그래서 진지한 글에서 비유는 잘 쓰지 않으려 하고, 비유가 맞네 틀리네 하며 다른 비유를 들고 와서 싸우는 건 덜떨어진 짓이라 생각하지만, 보고 있기에 좀 그렇다. 지금 다 포기하고 손 놓은 상태도 아니고, 이제 막 다 끌어올려서 본격적으로 얼마나 시간이 걸릴지 모를 조사에 들어가려는 참인데, 침몰 직후부터 '그들은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대전제 하에 온갖 추측이 난무하며 여기까지 온 거잖아. 지금 가장 많은 정보를 갖고 있는 건 아마도 민군합동조사단일 거다. 가장 전문성을 갖춘 것도 아마도 그쪽일 거다. 따라서 가장 합리적인 결론을 내릴 수 있는 것도 아마도 그들일 거다. 누누이 말해 왔지만 조금만 기다려 보자는 게 그렇게 어려운 일인지 난 잘 모르겠다. 물론 그냥 손놓고 넋놓고 기다리자는 게 아니다.

난 이 사건의 원인에 대해서 제대로 판단을 내릴 수 있는 지식도 없고, 또 그만큼 파고들 관심도 없다. 이 글도 북한어뢰설을 주장하려고 쓰고 있는 게 아니다. (연필굴려 찍기 수준의 신빙성밖에 없을 내 생각을 굳이 밝히자면 아군의 유실기뢰나 북한 어뢰다) 다만 일부에서 보이는 음모론적 사고방식은 보기에 참 피곤하다. 그들은 정말로 진지하게 그런 얘기를 하는 걸까? 난 정말로 진지하게 궁금하다.

한쪽에서는 음모론자들의 자폭, 다른 한쪽에서는 소 뒷걸음치다가 쥐 잡은 사람들의 자뻑. 자기 전에 잠깐 인터넷에 들어왔다가 밀려오는 짜증에 잠이 확 달아나버리곤 하는 요즘이다. 그리고 내일 아침엔 또 졸겠지. 젠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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